한국대중가요의 시대별 대표 작사가들

by 김은주 posted Feb 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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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 class="stress" id="TABLE_OF_CONTENT1"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광복 이전 작사가</h3>

광복 이전의 작사가들 중에는 문인 출신이 많았다. 그 때문에 대중가요 가사를 ‘가요시’라 부르기도 했다. 김억, 이하윤, 유도순, 박노홍, 조명암, 박영호 등이 모두 시인이나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대중가요 가사를 작사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던 작사가 조명암과 박영호는 광복 이전 작사가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

<strong>조명암</strong><br>1913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조명암(본명 조영출)은 와세다 대학 문학부(불문학 전공)를 졸업했다. 21세인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가’부문과 ‘유행가’ 부문에서 동시 입선하며 데뷔했다. 1930-40년대에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그는 본명 외에 조명암이란 필명을 가장 많이 사용했으며, 이가실이나 금운탄, 김다인 등의 필명도 사용했다.

<알뜰한 당신>, <선창>, <낙화삼천>, <진주라 천리길>, <처녀총각>, <울며 헤진 부산항>, <코스모스 탄식>, <화류 춘몽>, <꿈꾸는 백마강> 등이 모두 그의 작품으로 광복 이전에만 500곡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많은 히트곡 중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다”란 가사가 애틋한 <화류춘몽>은 기생의 순정을 그려 기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화륜선아가거라 / 화류춘몽 앨범 앞면, 이경호 소장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화륜선아가거라 / 화류춘몽 앨범 앞면, 이경호 소장</strong>

<strong>박영호</strong><br>조명암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은 대중가요 가사를 쓴 박영호는 본명 외에 필명 ‘처녀림’으로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또한 김다인이라는 필명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영호는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조선연극사, 연극시장, 황금좌 등에서 극작가로 활동했다.

1932년부터 대중가요의 가사를 쓰기 시작해 주요 작품으로 <세기말의 노래>, <짝사랑>, <번지 없는 주막>, <오빠는 풍각쟁이>, <청춘계급>, <망향초 사랑> 등이 있다. 생전에 조명암, 박영호를 가까이에서 본 작사가 반야월은 “조명암의 작품은 가늘고 여성적인 경향을 띠고 박영호의 작품은 선이 굵다”고 평한 바 있다. 2016년, 영화 「아가씨」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된 <세기말의 노래>는 시대상을 잘 반영한 노래 중 하나이다.

세기말의노래 / 방아타령 앨범 앞면, 이경호 소장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세기말의노래 / 방아타령 앨범 앞면, 이경호 소장</strong>

<h3 class="stress" id="TABLE_OF_CONTENT2"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광복 이후~1960년대</h3>

                광복 이후에는 반야월을 필두로 손로원, 유호, 손석우 등이 등장하여 대중가요를 풍성하게 했다. 유호는 방송 작가로 활동했고, 손석우는 비너스레코드를 설립하여 작사와 작곡을 겸하면서 한명숙과 최희준 등 많은 인기 가수들을 배출했다.                                  이 시기 대중가요 작사는 크게 트로트 계열과 팝 계열의 노래로 나뉜다. 내용적으로는 사실적인 내용과 낭만적인 내용이 공존했는데, 낭만적인 내용 중에서 이국적인 정취 등을 담은 가사도 많이 나왔다.        

<strong>반야월</strong><br>경남 마산에서 출생한 반야월(본명은 박창오)은 1939년 태평레코드사에서 주최한 가요 콩쿠르대회를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 1942년부터 반야월이란 필명으로 작사를 시작했고 광복 이후에 더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추미림이나 박남포 등의 예명을 사용해 금지 판정을 받았던 월북 작사가들의 작품들을 개사하기도 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사백환의 인생 비극>, <두형이를 돌려줘요> 등과 같은 사실적인 노래뿐만 아니라 <나포리 연가>, <차이나 아가씨> 같은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내용의 노래도 작사했다. <울고 넘는 박달재>, <유정천리>, <아빠의 청춘>, <소양강 처녀> 등은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유정천리 / 오늘도너를찾어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유정천리 / 오늘도너를찾어 앨범 앞면</strong>

<strong>손로원</strong><br>1911년에 철원에서 출생한 손로원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전국을 떠돌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의 가사 중에는 오늘날까지 애창되는 노래들이 많다.

손로현, 손회몽, 불방각, 손불경, 손영감 등의 다양한 필명을 사용했던 그의 대표작은 <페르시아 왕자>, <샌프란시스코>, <백마강>, <비 내리는 호남선>, <홍콩 아가씨>, <경상도 아가씨>, <봄날은 간다> 등이 있다. 백설희가 1954년에 노래한 <봄날은 간다>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사로 인정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향은내사랑 / 봄날은간다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고향은내사랑 / 봄날은간다 앨범 앞면</strong>

<strong>유호</strong><br>1921년에 출생한 유호(본명은 유해준)는 1세대 방송작가이자 작사가로 활동했다. ‘호동아’라는 필명을 사용했던 그는 광복 직후부터 작곡가 박시춘, 가수 현인과 함께 많은 명곡들을 발표했다.

휴머니즘과 페이소스가 공존한다는 평을 받기도 한 유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신라의 달밤>, <고향만리>, <비나리는 고모령>, <가을인가 가을>, <전우야 잘자라>, <이별의 부산 정거장>, <맨발의 청춘>, <떠날 때는 말없이>, <삼다도 소식> 등 셀 수 없이 많다.                                 < 비나리는 고모령>은 강제 징용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아들과 어머니가 헤어지던 대구의 고모령을 배경으로 한 노래이다.        

비나리는고모령 / 여인애가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비나리는고모령 / 여인애가 앨범 앞면</strong>

<strong>손석우</strong><br>1920년에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난 손석우는 중학교 시절, 목포에서 김해송이 연주하는 모습에 반해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설립한 비너스레코드사에서 1961년에 발표한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초창기 한류를 장식했다.

동남아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프랑스 샹송 가수인 이베트 지로가 한국어로 발표하기도 했다. 손석우는 작사와 작곡을 겸했고 세련된 노래로 인기를 이끌어냈다. 대표작으로는 <검은 장갑>, <이별의 종착역>,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등이 있다.

손석우 멜로듸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손석우 멜로듸 앨범 앞면</strong>

<strong>정두수</strong><br>정두수(1937~2016)의 본명은 정두채다.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난 그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1년 국민재건운동본부가 주최한 시 현상 공모에서 '공장'이 당선된 그는 1963년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로 작사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남진의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등 약 3,500곡을 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향을 주제로 하는 그의 많은 가사가 보여주는 문학적 감수성은 고향 하동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2013년에 「노래따라 삼천리」를 위시해 작사법과 관련된 저서를 출간했고 2016년 8월 13일 타계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시인 정공채는 그의 형이다.

덕수궁 돌담길 / 진달래 고개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덕수궁 돌담길 / 진달래 고개 앨범 앞면</strong>

남진 지구전속기념반 / 가슴아프게  / 서글픈 종착역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남진 지구전속기념반 / 가슴아프게  / 서글픈 종착역 앨범 앞면</strong>

<h3 class="stress" id="TABLE_OF_CONTENT3"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1970년대</h3>

1970년대는 청바지와 통기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 시대로, 음악적으로는 그들 세대가 주도한 포크음악의 전성기였다. 당시가 작사 작곡을 하고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의 시대였지만 70년대에도 뛰어난 전문 작사가들은 존재했다.

<strong>정귀문</strong><br>정귀문은 27세 때인 1968년 <숲속의 외딴집>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1,000곡이 넘는 노래를 작사했다. 특히 평생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지키며 향토적 정서를 담은 노래를 많이 발표해 향토가요 작사가로 불린다.

대표곡으로는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과 배호의 <마지막 잎새>를 꼽을 수 있다.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남사저수지 인근 소공원에는 <마지막 잎새> 노래비가 있다. <마지막 잎새>는 정귀문이 까까머리 소년시절 친구사이로 지내며 짝사랑했던 소녀(당시 교장선생님의 딸)를 떠올리며 만든 노래라고 한다.

배호 스테레오 일대작 제1집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배호 스테레오 일대작 제1집 앨범 앞면</strong>

<strong>김지평</strong><br>김지평은 작사가가 되기 전 교도관으로 근무한 이색적인 경력을 지녔다. 서울 구치소 교도관으로 근무하던 1972년 방주연의 빅히트곡 <당신의 마음>의 노랫말을 쓰면서 작사가로 데뷔했다. 이듬해인 1973년 한국가요대상에서 작사 부문상을 수상하면서 전업 작사가가 되었다.                                  이영옥의 <숨어우는 바람소리>와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도 그의 대표작이다. 교도관 시절 사형수들과 나누었던 교감이 그의 작품세계에 은연중에 영향을 끼쳤는데, <당신의 마음>도 실은 사형수들의 알 수 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가사라고 한다.        

당신의 마음 / 그대 변치 않는다면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당신의 마음 / 그대 변치 않는다면 앨범 앞면</strong>

<strong>지명길</strong><br>1965년 신세기레코드 전속 작사가로 활동을 시작한 지명길은 초창기 번안가요의 작사가로 이름을 날렸다. 트윈폴리오의 <축제의 노래>, <행복한 아침>, 이용복의 <어린 시절> 등이 당시 그가 개사한 대표곡들이다.

                80년대 들어서도 유명 칸초네인 알 바노 앤 로미나 파워(<span class="word_dic en">Al</span> <span class="word_dic en">Bano</span> & <span class="word_dic en">Romina</span> <span class="word_dic en">Power</span>)의 <<span class="word_dic en">felicita</span>>를 번안한 이용의 <사랑 행복 그리고 이별>의 노랫말을 썼다. 한편 혜은이의 <피노키오>와 <파란 나라>에서 보듯 동요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밖에 김만수의 <푸른 시절>과 이수만의 <파도>, 혜은이의 <이별의 종점>, 그리고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등도 그의 대표적인 히트곡이다.        

최진희 골든앨범 / 물보라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최진희 골든앨범 / 물보라 앨범 앞면</strong>

<h3 class="stress" id="TABLE_OF_CONTENT4"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1980년대</h3>

                1980년대는 음악적으로 상당히 풍요로웠던 시대였다. <span class="word_dic en">TV</span>를 비롯한 매스미디어를 통해 각광받으며 소위 오버그라운드 무대를 뜨겁게 달군 일군의 음악들과, 라이브 무대와 노래 운동 등을 통해 명맥을 이어간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공존했다.                                  그러나 최소한 대중가요의 관점에서 1980년대는 누가 뭐래도 조용필의 시대였다. 때문에 80년대의 대표 작사가라면 누구라도 조용필의 노래 한, 두 곡쯤은 작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trong>박건호</strong><br>2007년 사망 때까지 3,000곡에 달하는 작품을 남긴 박건호는 전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작사가로 손꼽힌다. 1972년 박인희의 <모닥불>로 데뷔해 80년대와 90년대를 관통하며 주옥같은 작품들을 무수하게 남겼다.

그는 작사가로 데뷔하기 전인 1969년 첫 시집 「영혼의 디딤돌」을 비롯해 다수의 시집과 수필집을 낸 문인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모닥불>을 비롯해 장은아의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이용의 <잊혀진 계절>, 나미의 <슬픈 인연>,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모나리자> 등이 있다.

이용 지구전속제1집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이용 지구전속제1집 앨범 앞면</strong>

<strong>양인자</strong><br>양인자는 남편인 작곡가 김희갑을 곡을 쓰고 가사를 쓰는 작가로 만나 함께 작업하다 결혼에 골인했다. 부부의 대표곡 중에는 유독 조용필의 노래가 많다. 양인자는 김동리 선생의 제자로 등단한 소설가인데, 방송작가로도 활동하며 다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는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 <바람이 전하는 말>, <Q>를 비롯한 조용필의 다수 곡들과, 김국환의 <타타타>,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문주란의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등이 있다.

조용필 제 10집 Part. Ⅱ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조용필 제 10집 <span class="word_dic en">Part</span>. Ⅱ 앨범 앞면</strong>

<strong>이경미</strong><br>오래도록 라디오 방송작가로 활동해 온 작사가 이경미의 대표곡은 한경애의 <옛시인의 노래>가 꼽힌다. <옛시인의 노래>의 가사는 순수시와 대중가요 가사 사이에서 하나의 탁월한 접점을 찾아낸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무명가수였던 한경애는 이 노래의 빅히트로 단번에 인기가수로 도약할 수 있었다. 작곡가 이현섭은 이경미의 남편으로 다수의 곡을 부부가 함께 작업했다. 그밖에 대표곡으로는 한경애의 <타인의 계절>과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 이선희의 <가난한 연인을 위하여> 등이 있다.

옛시인의 노래 / 겨울 바다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옛시인의 노래 / 겨울 바다 앨범 앞면</strong>

<strong>하지영</strong><br>1980년대 조용필의 히트곡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쓴 작사가는 하지영이다. 그 시대 조용필의 히트곡 절반 이상이 그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한때 하지영은 조용필의 전담 작사가라 불리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남편이 조용필의 1집에서 9집까지를 녹음한 ‘서울사운드’의 이태경 사장이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표작은 조용필의 <친구여>, <여행을 떠나요>, <들꽃>, <어제 오늘 그리고>, <허공>,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등이 있다. 조용필이 아닌 다른 가수의 곡으로는 이치현과 벗님들의 <사랑의 슬픔>과 이선희의 <서울의 밤>, 손무현의 <제목없는 시> 등이 있다.

조용필 9집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조용필 9집 앨범 앞면</strong>

<h3 class="stress" id="TABLE_OF_CONTENT5"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1990년대</h3>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를 한국 대중가요의 전성기로 보는 이들이 많다.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개성 있는 레이블의 존재를 기반으로 한 장르적 다양성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대체로 수긍되는 평가이다.                                  작사 측면에서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 작사가들이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특히 8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박주연과 지예가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며 최고의 작사가로 명성을 떨쳤다.        

<strong>박주연</strong><br>박주연은 1984년 데뷔해 1987년에 솔로앨범을 낸 가수였지만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선배의 권유로 작사를 시작해 1989년 변진섭 2집의 <너에게로 또다시>, <숙녀에게> 노랫말을 쓰면서 인기 작사가로 떠올랐다.                                  90년대 들어 윤상과 김민우, 윤종신 등과 작업하며 스타 작사가로 군림했다. ‘90년대의 노랫말은 박주연이 평정했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90년대 가사부문은 박주연의 시대였다.         

그밖에 대표작으로는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윤상의 <가려진 시간 사이로>와 <이별의 그늘>, 김민우의 <사랑일 뿐야>와 <입영열차 안에서>,  윤종신의 <오래전 그날>과 <너의 결혼식>, 김규민의 <옛이야기>, 김장훈의 <나와 같다면> 등이 있다.

김민우 1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김민우 1 앨범 앞면</strong>

<strong>지예</strong><br>지예도 두 장의 솔로앨범을 낸 가수였다. 여고시절 미스 롯데가 되고 탤런트로도 활동했을 만큼 매력적인 외모와 우수어린 목소리로 주목받았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1988년 변진섭의 데뷔앨범에서 <홀로 된다는 것>이 빅히트하며 인기 작사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윤상, 김종찬, 이정석 등과의 작업을 통해 90년대 초반 절정기를 맞이했다. 대표작으로는 변진섭의 <로라>, 윤상의 <잊혀진 것들>, 김종찬의 <산다는 것은>, 이정석의 <여름날의 추억>, 소방차의 <사랑하고 싶어>, 최진영의 <너를 잊겠다는 생각은> 등이 있다.        

이별의 그늘 / 남겨진 이야기 앨범 앞면

<strong class="c-title" style="-webkit-tap-highlight-color: rgba(0, 0, 0, 0);">이별의 그늘 / 남겨진 이야기 앨범 앞면</strong>

<strong>박창학</strong><br>고교 동창생인 박창학과 윤상은 ‘영혼의 짝’이라고 불린 오랜 콤비이다. 박창학은 국문과 졸업 후 고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며 작사를 시작해 성공을 거두면서 전업 작사가가 되었다. 그는 프로듀서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윤상의 많은 앨범들을 공동 프로듀싱했다.                                  ‘내 음악의 절반은 박창학이다’라는 윤상의 말은 박창학의 가사가 그의 음악에서 갖는 중요성과 그의 존재 자체가 윤상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잘 설명해 준다. 대표작으로는 윤상의 <한걸음 더>, <너에게>, <새벽>, <소년>, <사랑이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