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하지만 독특하게…美에 불만 표한 김정일

by 통준회 posted Aug 2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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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지미 카터(Carter) 전 대통령 주연의 ‘한반도 드라마’는 재연(再演)되지 않았다.

25일 방북한 카터 전 대통령은 예상과는 달리 2박3일간 평양에 머물렀지만 끝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못하고 귀국했다. 94년 방북 당시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을 만나 영변 핵시설 동결 및 남북 정상회담 개최 용의 발언을 이끌어냈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김정일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김정일이 중국에서 돌아와 그를 늦게라도 만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불발로 그쳤다. 3시간 동안 김일성과 대동강 뱃놀이를 하면서 동북아 정세를 논했던 것은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게 됐다.

미국에서는 김정일이 미국의 전직 대통령을 방문하게 한 후 중국으로 떠나버리는 돌출행동을 한 것은 당분간 미국과의 대결구도를 계속 가져가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보고 있다.

워싱턴 DC의 외교 소식통은 “유치하긴 하지만 김정일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천한함 폭침(爆沈) 이후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계속하고 대북 추가 제재를 준비 중인 미국에 대한 불쾌감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김정일이 한·미 양국에 맞서기 위해 중국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확고한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오바마 정부는 분석하고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이 북·중(北·中) 간의 관계가 굳건함을 부각시키는 데 활용됐다는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86세의 카터가 독자적인 행동을 할 것에 대비, ‘사적이고 인도주의적이며 비공식적인 임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는데 그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 왔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 위원장이 카터 전 대통령에게 아무런 정치적 역할도 맡기지 않은 것을 자신에 대한 무시로 해석해서 홀대했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한편에서는 카터 전 대통령이 1994년 김일성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을 떠올리며 김정일 면담에 대한 확실한 보장 없는 상태에서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이런 상황을 자초했다는 시각도 있다.

오바마 정부 내에서는 카터가 김정일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다소 안도하는 기류가 있다. 카터가 미국인 곰즈를 데리고 평양을 출발한 후 이례적으로 그의 방북과정을 공개함으로써 다시 한번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국무부의 필립 크롤리(Crowley) 공보담당차관보는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미국) 정부는 이번 방북을 제안하거나 주선하지 않았다”고 했다. “곰즈의 건강이 미국에서 즉각적인 치료를 받지 않으면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판단을 토대로 정부는 북한의 방북 제안을 수용하겠다는 카터 전 대통령의 결정에 동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굳이 공개하지 않아도 될 내용을 밝힘으로써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 당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논의한 것을 바탕으로 대북정책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의사를 표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왜 먼 길을 날아온 카터 전 대통령을 만나지 않고 중국으로 가버렸을까? 안보 부서 당국자는 27일 “카터가 억류자를 데리고 가는 것 외에 다른 임무는 부여받지 못한 것이 확실해 보이자 예정대로 떠난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이 고대하던 북·미 직접 대화의 기회가 왔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특사가 아닌 카터 전 대통령은 김정일이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유호열 고려대 교수는 “북한의 메시지는 당분간 미·북 관계 개선보다 북·중 관계 강화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북한은 한·미의 대북 제재 흐름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중간한 미국과의 접촉보다 중국과의 유대 강화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전략을 쓸 것이란 관측이 많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소 박사는 “중국 우산 밑에서 최대한 버티겠다는 신호”라고 했다.

북한으로선 중국의 경제 지원만 받을 수 있으면 미·북, 남·북 관계의 긴장을 끌어올리는 게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대외(對外) 긴장은 후계 세습을 앞두고 내부를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북한 당국은 주민들만 굶어 죽지 않으면 체제 유지와 후계 세습에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 특히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중국 지원만 있으면 이명박 정부가 끝날 때까지 강경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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