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애틀 거주 실향민

by 통준회 posted Jul 0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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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배 위원이 만난 사람/③6ㆍ25참전 유공자 박영환 할아버지

13-06-16
"6월이 되면, 저승으로 보낸 전우들에게 죄인된 심정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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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환 할아버지가 표창장이 가득 걸린 집안에서 한국전 당시 사용했던 철모를 쓰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혈혈단신 38선 넘었다 국군으로 자원입대해 한국전쟁 치러

“매년 6월, 이맘때가 되면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우들이 사무치도록 생각이 나곤 해. 특히 금화전투 도하작전에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수많은 아군이 부상해 핏물로 변해버린 북한강 하류로 떠내려 가면서 ‘사람 살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도 당장 총알을 주고 받는 격렬한 전투를 벌이느라 구조의 손길 한번 뻗치지 못했어.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저승으로 보낸 전우들에게 죄인이 된 심정뿐이야….”

박영환(81) 할아버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ㆍ25 전쟁이 발발한 지 63년이 지난 세월이 말해주듯 머리에는 서리가 내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볐던 혈기왕성한 군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파이고 팔순을 넘긴 노인의 모습이지만 참혹했던 전쟁의 기억만은 아직도 또렷하기만 했다.

그의 꿈은 남북통일이 되어 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지만 무심한 시간만이 흘러 그 실낱 같은 희망마저 거의 포기하고 있는 상태다.

더욱이 천안함 폭침 등에서 보듯 남분간 군사충돌은 계속되고 있고 북한은 올해 들어서도 핵 위협을 서슴지 않고 있다. 공식적으로 남과 북은 정전협정으로 전쟁을 종료한 것이 아닌 휴전상태다. 휴전이란 말 그대로 휴식이 끝나면 언제든지 다시 전쟁상태로 돌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6.25 전쟁은 30만 여명의 아군과 130여만 명의 공산군 측 인명피해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세계 최악의 동족상잔이었다. 1,000여만명의 이산가족과 전쟁고아를 양산했고, 당시 국토의 80%이상이 파괴된 참극이었다.

이처럼 몸서리 처지는 한국전쟁을 온 몸으로 치러야 했던 박영환 할아버지의 삶을 듣노라면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6ㆍ25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상흔은 현재도 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자유를 찾아 혈혈단신 38선을 넘었다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으로 자원입대했던 노병(老兵)을 만나 개인, 그리고 가족사를 포함해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들어봤다.

독립유공자 후손서 반동분자 후손으로…

박 할아버지 집안은 원래 독립운동 가족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김일성 공산집단의 출현으로 독립유공자 후손이었던 그의 가족은 하루 아침에 반동분자 후손이란 빨간 글씨가 덧씌워졌다.

그의 어머니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장남인 박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까닭에 어려서부터 가장의 무거운 짐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면사무소 급사를 시작으로 막노동이며 닥치는 대로 어떤 일이든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움직여야만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면사무소 급사로 사춘기를 보내던 어느 날 북한군 입대 영장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독립유공자 가족에서 하루 아침에 반동분자 후손으로 바뀐 상황을 걱정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영장을 받아 들자 크나큰 결단을 내리게 된다.

박 할아버지는 “어느 날 어머니께서 부르시더니 내 손을 꼭 잡고 펑펑 울며 ‘평생 반동분자 후손이란 소리 듣지 말고 남쪽으로 내려가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라’고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귓전을 때린다”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한 그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정도 전인 1949년 6월 칠흑 같은 야밤에 혼자 38선을 넘어 아무도 반겨줄 사람이 없는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기도 지쳐 숙식을 제공한다는 소리에 강원도로 달려가 오징어잡이를 하다 6ㆍ25 전쟁 발발 소식을 접했다. 피는 못 속인다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원입대를 하게 된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전우들의 절규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아군은 군 기본교육도 시키지 못한 채 신병들을 전선으로 배치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하루가 지나면 하나 둘씩 줄어드는 전우들을 보며 눈에는 핏발이 섰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어디였냐”는 질문에 박 할아버지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금화지구전투와 인제군 기린면 현리전투”라고 말했다.
전쟁의 참혹함은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없지. 숨이 넘어가며 ‘살려 달라’는 절규에도 손을 쓸 틈도 없이 저승으로 떠나 보낸 전우들이 얼마나 원망을 하겠어. 북한군의 잔인성은 상상을 초월하다 못해 끔찍해. 현리전투에서는 부상병을 호송중인 앰뷸런스 행렬에 불을 지르는 잔인무도함을 내 두 눈으로 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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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 당시인 1951년 박영환(왼쪽) 할아버지가 금화지구전투에서 전우와 함께 찍은 사진>




그는 “6ㆍ25참전용사들은 삼망(三忘)을 실천했다. 첫째, 명령을 받고서는 집을 잊었고, 둘째, 싸움터에 나가서는 부모를 잊었고, 셋째, 공격의 외침을 듣고서는 자신을 잊었다”며 목에 실핏줄을 세워가며 음성을 높였다.


박 할아버지는 3년의 전쟁을 치르며 자신은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것이 다행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큰 짐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매년 6월이 찾아오면 가슴이 아려오며 죄책감이 아닌 죄책감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유공자 연금 12년째 장학금으로 쾌척



미국 정부 보조를 받고 생활을 하면서도 박 할아버지는 올해로 12년째 한국에 장학금을 보내고 있다. 매년 한국 보성여자고등학교에 5,000달러씩의 장학금을 송금한다. 장학금의 명칭은 그의 할아버지 이름을 딴‘박승호장학금’이다.




3ㆍ1운동을 하다 순직한 그의 할아버지 고 박승호 열사의 후손 자격으로 받는 연금과 본인의 6ㆍ25참전유공자 연금을 모아 매년 전달하고 있다. 흔한 말로 ‘고물자동차’ 한 대도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한푼 두푼 모아 선행을 베푸는 할아버지의 미담이 혹독한 불경기로 찌든 미간의 주름살을 펴게 만든다.




장학금 수혜 학교로 보성여자고등학교를 지정한 이유는 북에 두고 왔던 어머니의 모교이기 때문이란다. 끼니조차 때우기 힘든 상황에서도 아들에게 자유를 만끽하며 살라고 등을 떠밀었던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담았다고 박 할아버지는 설명했다.




그러나 박 할아버지에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이 앞서고 있다. 독립유공자후손 연금도, 6ㆍ25참전용사연금도 본인이 사망하면 자동으로 중단되기 때문이다.



박 할아버지는 “장학금이 중단되면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중단해야만 하는 학생들이 있을 텐데 나의 자화상을 돌아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어린 나이부터 가장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을 에둘러 표현했다.

거실 벽면에 6개 표창장과 6ㆍ25 참전용사증서

타코마 다운타운 노인아파트에 살고 있는 박 할아버지 아파트 거실에 들어서면 6개의 표창장이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세월의 때로 누렇게 변색이 되어 있었지만 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가 한국 대통령들로부터 받은 표창장이 여느 단체장들이 받는 표창장과는 엄격한 차이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조와 전쟁터에서 전우와 함께 찍은 흑백 사진을 자신있게 걸어 놓고 있는 모습에서 박 할아버지뿐 아니라 그 아버지, 그리고 그 할아버지 등이 오랫동안 보여왔던 애국심을 읽기에 충분했다.



박 할아버지는 아직도 자신의 군번 줄을 목에 걸고 다닌다. 한국전쟁 당시 사용했던 철모와 탄창집, M-1 실탄도 거실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있다.



그는 “자기 부모도 모르는 게 공산주의자들”이라며 “탈북자들이 숫자가 늘어만 가는 이유는 사상보다는 배고픔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몸은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동포들이 안보의식을 강화해 한반도가 평화의 안식처가 되도록 많은 관심을 갖자”고 당부했다.





시애틀N=김성배 편집위원 sbkim@seattl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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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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