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89년 11월 10일은 에버하르트 쿠어트(Eberhard Kuhrt) 당시 서독 내독관계부 과장에게 ‘지각변동의 날’이었다.
그는 동독 정책에 대한 학계 연구를 지원하고 관련 자료의 관리·배포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내독장관에게 관련 동향을 보고하는 것도 주요 임무였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는 내무부로 소속을 바꿔 2013년까지 동독 연구와 재건 지원 활동을 담당했다.
2010년에는 독일 내무부와 한국 통일부 사이의 통일 관련 업무 협력팀을 조직하고, 한-독 통일자문위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쿠어트 전 과장은 26일 연합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동독 정권이 붕괴한 결정적 요인으로 소련 경제의 위축과 그에 따른 위성국가 통제력 약화를 꼽았다.
그러면서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가 독일 통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독일 내부의 역량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서독의 대 동독 정책 중심추가 1950년대 '힘의 대결'에서 1960년대 들어 '긴장완화와 교류 확대'로 옮겨간 배경은.
▲ 1950년대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정책 주안점은 소련과의 교섭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끌어내는 것에 맞춰졌다.
그러나 소련과 힘의 대결을 벌여, 유럽이 처한 교착상태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갈수록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드러났다.
재래식 전통무기에서 우세한 소련이 핵과 미사일 기술 개발에 나섰고, 특히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서방 국가들에 베를린 침공을 위협했다. 1962년 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넘기면서 동-서 진영 간 관계 개선을 위한 해빙무드가 마련됐다.
-- 1960년대 동방정책이 나올 수 있었던 독일 내부의 상황 변화를 꼽는다면.
▲ 독일의 분단 상황은 1961년을 기점으로 더욱 굳어졌다. 소련과 동독 지도부가 '철의 장막'에서 유일하게 열어놓았던 베를린 국경에 장벽을 설치한 것이다. 서독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조속한 통일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포기하는 대신 동독 주민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는 쪽으로 동독 정책을 수정했다.
사민당-자민당 연정(1969-1974년)의 빌리 브란트 총리 정부는 동독을 '독일의 2번째 국가'로 인정, 내독 교류의 활성화에 큰 걸음을 내디뎠다.
-- 독일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 동독 정권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은 소련과 그 동맹국들의 약화다. 구조적으로 비혁신적이고 비효율적인 중앙통제식 경제체제가 이들 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쇠락을 불러왔다. 경제력이 약화된 소련은 동맹국들에 값싸게 주던 원유 공급량을 1982년 10% 줄인 뒤 계속 감축 폭을 확대했다. 석유화학 제품을 서방에 수출해 외화를 벌어야 하는 동독으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신(新) 사고' 외교정책 노선은 위성 국가한테 스스로 운명을 책임져야 하는 '각자도생'을 의미했다. 동독 주민들의 대규모 탈출과 시위가 번졌지만, 통제력을 상실한 소련은 1953년 동독 시위 진압 때와 달리 개입하지 않았다.
-- 베를린장벽 붕괴 후 동독이 통일을 선택하게 된 배경은.
▲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동독 주민들 대부분이 서독 주민과 결속감을 유지하고 있었고 통일을 원했다. 그 덕분에 1990년 3월 치러진 동독 지역 내 첫 자유 총선에서 독일 통일을 지지하는 정당들이 전체 투표의 4분의 3 이상을 획득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동독 지역 재건을 생각할 때 경제력을 가진 서독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고, 세 번째로는 서독 정부의 시의적절하고 단호한 정치적 결정을 들 수 있다.
-- 동서독 교류를 가능하게 한 것이 '서독의 돈'이었나.
▲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가 언젠가 내독관계의 토대는 '현찰을 통한 인권개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동독 외무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동독의 내독관계에 대한 관심은 오직 외화 수급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은 1971년 집권 후 주민의 생활수준을 개선함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다. 그러나 '복지사회주의' 정책에 필요한 자금을 동독 경제가 독자적으로 충당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동독의 서방 은행 채무는 지속적으로 불어났고, 동독은 부채 관리를 위해 점점 더 많은 외화를 필요로 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서독에서 흘러들어간 마르크는 동독의 외화 보유고를 유지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 서독이 동독에 대한 재정지원으로 무엇을 얻었나.
▲ 1972년부터 1989년까지 140억 마르크를 공식적으로 제공했다. 이 중 34억 마르크는 정치범 석방의 명목이었다.
1983년과 1984년 동독이 채무불이행 위기에 몰렸을 때 서독 정부는 서독 은행들의 20억 마르크 신용대출에 보증을 섰다. 그후 동독은 서독 여행자들의 국경 통과 절차를 개선했고, 국경에 설치된 총기와 지뢰를 제거했다. 모든 동서독 주민 간 방문 확대 조치는 서독의 재정지원과 결부돼 있다.
-- 한반도의 통일 여건은 독일에 비해 좋지 못하다. 남북통일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
▲ 우리는 통일 전 7년간 재정건전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정부의 살림살이가 튼튼했다. 통일 비용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정적으로 튼튼한 토대가 없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다.
통일에 따른 도전에 직면했을 때 국민이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분단이나 통일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국가, 특히 중국으로 하여금 한반도 통일이 자국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도록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