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차별을 막는 길

by 통준회 posted Aug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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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만나러 갑니다’는 개국과 함께 시작된 채널A의 장수 예능 프로그램이다. 채널A의 ‘잘살아 보세’ 역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두 프로그램 모두 동 시간대 시청률 1위에 오르고 있다. 무엇보다 두 프로그램 모두 주요 출연진이 탈북자들로 꾸며진 게 특색이다. 긴 분단에 따른 이질감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섞이고 부대끼며 남과 북이 생활 문화를 절충해가는 모습이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아직도 ‘탈북자’라는 호칭에 둘러쳐진 벽은 높기만 하다. 최근 두 탈북자의 교차된 생사를 지켜보며 그런 걱정이 더 커졌다. 13일 인천 송도국제도시의 고층 빌딩 사이에서 40대 남성 청소원이 추락해 숨졌다. 그는 10년 전 탈북해 남한에 정착했지만 허망하게 삶을 마감했다. 그는 북한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지냈던 엘리트 출신이다. 간 질환을 앓고 있는 아내의 병을 고쳐주겠다며 사선을 넘었지만, 남한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북한에서 받은 의사 자격증은 남한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다시 자격시험을 치를 수도 있었지만 아내의 병을 고치는 게 먼저였다.

정착교육 때 굴착기 운전자격도 땄지만 일거리 찾기가 쉽진 않았다. 그나마 남한에서 허락된 직업은 주차관리원이나 청소원이었다. 그래도 불평은 없었다. 유산으로 남겨진 이 탈북자의 일기장에는 맡겨진 일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안전장비도 없이 유리창을 닦다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아내의 병은 꽤 치료가 됐지만, 남한에서 다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은 끝내 이룰 수 없게 됐다. 더구나 고용 업체와 보상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다가 장례도 열흘 뒤에나 치렀다.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하던 태영호 공사는 가족과 함께 자유 대한의 품에 안겼다. 태 공사 가족의 귀순은 1997년 2월 황장엽 전 비서의 망명만큼이나 신선한 충격을 줬다. 1997년 미국으로 망명한 장승길 당시 주이집트 북한대사에 이은 19년 만의 최고위급 북한 외교관의 탈북이라는 의미도 컸다. 특히 태 공사의 부인 오혜선 씨는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로 노동당 군사부장을 지낸 오백룡의 친척이다.

베테랑 외교관과 빨치산 가족이라는 북한 내 최고 ‘금수저’들의 탈북은 북한 내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라는 기대도 한껏 키웠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김정은 체제의 심각한 균열을 언급하기도 했다.

태 공사는 김정은 체제에 대한 염증과 자녀의 장래 문제로 탈북을 결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체제 불안에 대한 회의, 가족 문제라는 점에서 13일 숨진 엘리트 의사 출신 탈북자의 10년 전 탈북 배경과 닮아 있다. 의사 출신 탈북자처럼 엘리트 외교관 출신인 태 공사도 남한에서 탈북자로서의 삶을 걸을 것이다.

“남한 사람 눈 밖에 나지 않는 게 바로 살아남는 전술입니다.” 며칠 전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던 탈북자가 푸념처럼 던진 말이다. 고위 무관 출신으로 남한 생활 10년 차에 접어든 그의 말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처절했다. “고위직이라는 출신 성분 덕분에 국가 기관 일을 맡게 되는데, 아무리 동료라고 해도 남한 출신이면 그 뒤에 연고나 학연이 줄줄이 엮여 있고, 결국 그런 연줄을 이용해 앙갚음을 해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태 공사, 또 뒤이을 제2, 제3의 태영호가 이런 처절한 남한 생존기를 겪지 않길 바란다.

‘우리와는 다른 탈북자’라는 굴레를 씌우는 건 인종차별과 다름없는 가혹한 차별이다. 외면이 가장 가혹한 차별이라는 말이 있지만, ‘탈북자’라는 출신만큼은 외면해 버리는 게 차별을 막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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